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트 불교 (문단 편집) === 교학과 수행의 일치 === >온갖 유정으로서 발심하여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아가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청정한 시라(尸羅, 즉 계율)에 안주하고, 그런 연후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이를테면 먼저 진리의 관찰에 수순하는 청문(聽聞)을 섭수하고, 듣고 나서는 들은 법의 뜻[法義]을 부지런히 추구하며, 법의 뜻을 듣고 나서 전도됨이 없이 사유해야 하니, 사유하고 나서야 비로소 능히 선정에 의지하여 수습(修習)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수행자는 이와 같이 계(戒)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닦아 문소성혜(聞所成慧)에 의해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고, 사소성혜에 의해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譯) 문을식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에 따르면 서양의 철학(philiosophy)은 주로 논리적, 사변적, 분석적 방법을 통해 지혜(sophia)를 얻지만 인도의 철학(darśana)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지혜(jñāna, prajñā)를 얻는다. * '''듣고 배워서 얻어진 지혜(śruta-prajñā)''': 오랜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검증되고 실험되어 온 옛 성현(ṛṣi)들의 경험과 탐구 결과를 듣고 배우는 방법(聞, śruta, śramaṇa) 이다. 이것은 다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만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동적 노력이 포함되는 활동이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문혜(聞慧, śruta-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경전이나 논서들의 텍스트를 이해, 해석하고 현대언어로 번역하고 설명해주는 해석학적 방법인 정언량(正言量, śabda-pramāṇa)이 있다. 단, 디그나가(Dignaga)는 정언량 혹은 성언량(聖言量) 또한 비량(比量)의 한 종류인 신허비량(信許比量, āpta-anumāna)으로 보고, 인식의 근원은 비량과 현량(現量) 뿐이라는 이량설(二量說)을 주장하였으며 티베트 불교에서도 이를 따른다. *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anumāna-prajñā)''': 바깥으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 것과 스스로의 경험을 자료로 하여 그것을 논리적, 합리적 기준(yukti, anumāna)에 맞추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른 견해와 주장과 견주어 토론하고 논쟁하며, 더 나아가 그런 자료들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지적 공유물이 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체계화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를 '''사혜(思慧, anumāna-prajñā 또는 cintā-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수혜 그리고 스스로의 지적 경험을 자료로 하여 의심하고 비판하고 토론하고 논증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논리적 방법인 비량(比量, anumāna-pramāṇa)이다. *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bhāvana-prajñā, samādhi-prajñā)''': 마지막으로 문혜와 사혜로부터 얻어진 언어적, 개념적 관념적 지혜를 체험적이고 직접적이며 직관적 지혜로 변환시키는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를 '''수혜(修慧, bhāvana-prajñā)''' 또는 '''삼매의 지혜(三昧慧, samādhi-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사혜에 기초하여 요가행법을 실천하는 것(現量, yogī praktiasa, sākṣātkāra)이 있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직접적 지각(知覺)인 현량(現量) 중에서도 유가사의 선정(禪定)상태에서 대상을 지각하는 유가현량(瑜伽現量)에 해당한다. [[http://naver.me/xCfJ6hHY|문을식,《요가 상캬 철학의 이해》]] 안성두 서울대 교수는 겔룩의 창시자인 쫑카빠의 견해에 의거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고(聞) 사유(思)하는 교학과 수행(修)의 불가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쫑카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직접적 가르침과 경전적 가르침을 상호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보다 우선적인 과정은 경전의 가르침을 듣는 데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해 증득된 바로 그것이 수혜(修慧)에 의해 수습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쫑카빠는 경마의 비유를 들어 청문(聽聞)과 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는 직접적 수행은 "경주할 장소를 먼저 보여준 후에 경주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만일 경주할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경주한다면 실제 노력에 비해 소득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 또한 쫑카빠는 "위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수행의 요체를 결여한 단순한 설명으로만 간주하고, 수행의 요체는 오직 핵심적 의미를 설하는 스승과 제자 간의 은밀한 직접적 가르침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가르침의 단절이라는 업장을 쌓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해탈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교설은 위대한 경전일 뿐이다. [[http://naver.me/Gz7zidW1|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불교의 이해》]] >문: 진리(사성제와 무상無常 등 16행상行相)를 봄으로써 해탈하니 >공성을 보는 것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 >답: 이 도道(공성을 깨달은 도)가 없이는 보리가 없다고 경에서 설하기 때문이다. > >법의 뿌리가 비구이기에, (성문의 성자인 비구들이 공성을 깨닫지 못한다 하면) 비구 또한 머물기 어렵네. >마음이 대상을 가지는 한 열반 또한 머물기 어렵게 되네. >번뇌(세간도의 멸한 대상인 번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윤회에서] 벗어난다면 >(현전現前한 번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곧바로 해탈하게 될 것이다. >---- >《입보리행론》 화두일구(話頭一句)만을 참구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는 선불교나 아함경, 니까야 등 초기 경전을 중시하는 측에서는 대승불교의 교학이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수행과 동떨어진 가르침이라고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법(心法)은 오직 화두나 공안을 참구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사성제 팔정도 등 초기불교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히 해탈이 가능하며 대승 불교 사상도 초기 불교 교리 안에 모두 포섭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대승불교의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불교인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은유적이고 함축적이며, 이는《능가경》, 《금강경》 , 《화엄경》 등 대승 경론에서 설해진 교의(敎義)들의 중국적 수용이자 실천적ㆍ신비적ㆍ심미적 변용에 다름 아니다. 한편 초기불교는 만일 대승불교의 교학이 초기불교의 교리를 보다 분명하고 심도있게 해석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법(法)을 실체화하는 오류를 답습하고 있을런지 모른다. 부파불교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자아는 무아이지만 구성 요소인 법은 실체가 있다'는 아공법유(我空法有)로 변질된 바 있으며, 현대 위빠사나 수행자들 가운데에서도 찰나생멸을 관하면서 '찰나 동안 지속되는 실체'를 인정하는 오류에 빠지는 경우 등을 찾을 수 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유부의 견해를 비판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것도 지나치게 단편적인 접근일 것이다. 법체에 대한 유부의 실재론적 해석은 현상과 인식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며 그 역시 무아론의 논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없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유부의 주장은 불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불교 4대 학파의 학설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8세기 경 귀류논증 중관학파 논사인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사성제 등으로 충분하다는 소승 학파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사성제만으로 해탈에 이르지 못한 소승 수행자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샨티데바는 경전을 근거로 공성 또한 불설(佛說)에 포함됨을 강조하였고, 인무아를 자각하는 지혜만으로 해탈을 이루는데 충분하다고 여기는 후대 수행자들의 자질을 문제삼았다. 그는 법무아를 증득하지 못하면 해탈하여 아라한이 될 수 없으므로 승의(勝義)의 승가를 세울 수 없다고 보았다. 마음이 대상을 갖는 한, 즉 법아집(法我執)이 있는 한 이로 인한 다른 번뇌가 생겨 열반을 얻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소승 아비달마에 법아집 뿐 아니라 인아집(人我執)과 관련된 다른 번뇌들도 설해지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아비달마에서 설해진 번뇌만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유부ㆍ경량부 등 소승 학파에서 현전하는 번뇌를 제거하였음에도 즉시 열반에 이르지 못한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http://naver.me/G5uFt9Zh|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 >일부의 원인으로 일부의 결과만을 이루고 >일체의 원인으로 일체의 결과를 모두 성취한다.[* ཉི་ཚེ་བའི་ཐེག་པ་(니체와 텍빠): 일부승. 단편적인 부분의 승인 소승(小乘) མཐའ་དག་པའི་ཐེག་པ་(타닥빼 텍빠) = ཐེག་པ་ཐམས་ཅད་པ་(텍빠 탐쩨빠): 전체승. 대승(大乘)] >---- >《대비백련화경(大悲白連華經)》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 법성(法性)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비단 대승불교 뿐 아니라 불교사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이른바 '초기 경전'이라 일컬어지는 아함과 니까야 역시 붓다의 온전한 친설(親說), 원음(原音)이 아니며, 수 세기에 걸친 역사적 변천 과정을 거쳐 각 부파에 의해 채택된 부파불교 시대의 산물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경전 내부에 수정ㆍ가감으로 인한 신ㆍ고층(新古層)이 존재하고, 경전 구성에 있어서 각 부파들의 판본마다 분명한 차이를 보이며,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도 각 부파 고유의 관점이 반영된 논장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불교에도 새로운 방편과 해석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등장한 대승의 사상은 석가모니의 본의(本義)를 분명히 밝혀 수행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내도(內道)의 다른 학파들 및 외도(外道)들과 경쟁하고 교류하면서 불법(佛法)을 더욱 풍요롭게 발전시켰다. 대승 논사들은 근본스승인 석가모니를 존숭하며 대승 경전 뿐 아니라 초기 경전 또한 자신들의 전거로 삼았고, 학자이자 동시에 수행자로서 자신의 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精緻)한 이론을 전개하며 궁극적으로 마음, 의식의 변화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자타의 이익과 안락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대승의 사상적 기조는 수행과 무관한 지적 유희나 근원과 단절된 급진적인 변용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 배우는 반야, 중관, 구사, 인명, 계율 등 오부대론은 인도 나란다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유래한 구성으로, 팔만사천법문 중에서 수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경율론만을 선정하여 압축한 교과 체계이다. 10여 년에서 길게는 20년 이상 소요되는 티베트 불교 교학과정이 상당히 방대해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해탈 뿐 아니라 일체중생을 위한 성불을 목표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三乘)과 행, 소작, 요가, 무상요가의 사부(四部) 딴뜨라를 모두 아울러 배우는 인도-티베트 불교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티베트 불교 승려 모두가 강원과정 전체를 이수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수준과 여건에 맞는 공부와 수행을 하며 기도, 의식, 행정 등의 직무를 담당하는 승려들도 많다. 또한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재가 불자들을 위해 람림, 로죵 위주로 축약된 교학과정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